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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과 세종대왕

by 나도1등복권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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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의 창제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입니다. 매년 10월 9일입니다. 한국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제정하고 반포한 세종대왕의 위업을 선양하고,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려서 문화민족으로서 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우려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며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참배하면서 전국에서는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합니다.
시행일은 1926년 음력 9월 29일이며, 국경일이며 공휴일입니다.
2022년에는 10월 9일(일요일), 10일은 대체휴일입니다.


 

 

한글날의 기원

한국 고유의 문자 체계인 한글을 기념하는 날을 제정하려는 노력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가 주축이 되어서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하였고 1928년에는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습니다. 1932년,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년~45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습니다. 지금의 한글날은 1940년 <훈민정음>에 발견된 해례본 말문에 적힌 "正統十一年九月上潮"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어서 1945년에 10월 9일로 확정되었습니다.





국경일과 공휴일의 지정과 관련행사

이에 따라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에 의해 1949년부터 공휴일로 지정이 되었고, 1982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한 기념일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공휴일이 많아서 경제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재계의 여론에 따라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지만 공휴일 지정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국경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2월 28일에 개정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서 공휴일로 다시 지정되어서, 2013년부터는 공휴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한글날 기념행사는 <국어기본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국어기본법 시행령>에는 한글발전유공자 및 세종문화상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행령에 따라서, 정부는 한글날 기념행사에 한글과 국어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매우 큰 개인이나 단체를 '한글발전유공자'로 포상하고, 한글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 공적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서 '세종문화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한글과 세종대왕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세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초상화를 보고있자면 누구나 세종이 미남형이고 인자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세종(1397~1450, 제위 1418~50)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바쁜 정무에 무척 시달렸다고 합니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정무를 보았으며 밤에는 학문까지 익혔으니 심신이 무척이나 고달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힘든 생활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30여 년을 하루같이 견뎌 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쉰 살이 넘고부터는 잔병이 잦았다고 합니다.
세종은 죽기직전까지 정무를 모았는데, 죽기 이틀 전에는 일대 대사령을 내렸습니다. 1450년 2월 15일 이전의 모반대역죄와 악질적인 살인죄나 강도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한다는 유지를 내린 것입니다.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대사면을 내린 사례는 대단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종은 죽기 직전에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 있는 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세종이 거처를 영응대군의 집의 동별궁으로 옮겨갈 때 선공감 벼슬아치들이 화재를 막기 위해서 주변의 인가를 허물려고 했지만 세종은 인가를 허물지 말고 화재를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분부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민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방원은 세종의 총명함과 근면함과 자애로움을 보았기에 조선 왕조의 수성(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이어서 지킴)을 맡기려고 한 것입니다. 원래 한 왕조가 창업을 하게 되면 뒤어어서 기반을 다지는 군주가 있어야 탄탄해지는 법입니다. 태종은 왕권의 확립 등으로 수성을 도모했지만 아직 미진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 수성의 마무리를 셋째 아들에게 맡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서 세종은 동궁에 책봉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일생과 일화

10대인 세종은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건강을 염려한 부왕은 모든 책을 거두어 감추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병풍 사이에 책 한 권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그 책을 숨겨놓고 몰래 수백 번이나 읽었습니다. 세종의 총명함은 그 자신도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았다."고 말했고, "내가 궁중에 있을 적에 책을 손에 잡지 않고 한가로이 지낸 적이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총명만 믿지 않고 경서와 같은 중요한 책은 100번씩 읽어서 그 뜻을 완전히 터득했고 제자백가와 역사 책은 30번이나 읽어서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정도로 정진을 거듭했습니다. 이런 세종이었으므로 호학의 군주로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종은 즉위 뒤에도 호사스런 생활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경회루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남은 재목으로 별실을 짓게 했습니다. 그런데 돌층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짚으로 만든 짚등을 올려 늘 이곳에 거처했다고 합니다. 문 밖에 짚자리를 깔아 놓아도 이를 거두도록 했습니다.


 어느 벼슬아치가 "공물로 금, 은을 바치는 것을 감해 주었으니 보라매를 대신 바치게 하여 궁중에서 기르자"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태종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보라매를 잡기가 매우 어려우며,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달아나면 길들이는 사람이 여염집에 들어가 수색하는 따위로 폐단이 커져서 태종 임금도 놓아 준 적이 있었다며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종은 당뇨병(소갈증)으로 늘 고생했다고 합니다. 어느 신하가 소갈증에는 흰 수닭, 누런 암닭, 양고기가 효험이 잇으니 매일 임금에게 들이자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양고기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또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동물의 생명을 해칠 수는 없다며 끝내 이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남다른 우애를 지닌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형 양녕대군은 방탕한 생활을 한 탓으로 아버지 태종에게서 내쳐졌습니다. 이후에 그는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종이 죽자, 세종은 "형이 나이가 많아 예전 행동이 없어졌을 것이다."라며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울로 오게 해서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가서 깍듯이 대했고, 신하들이 너무 가까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만류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두 형과 아우들을 남달이 아끼며 자주 술자리를 베풀고 친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술을 마시면서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았고 잔치를 좋아하면서 탐닉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검소와 자애로 대했기에 궁궐의 창고에는 늘 물품이 남아돌았으며,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큰 옥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친의 단속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종친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을 먹으면서 벼슬아치들을 깔보며 거들먹거리기 일쑤였습니다. 세종은 종학을 설치하고 종친들에게 학문을 익히게 했습니다.

기본 수양을 쌓음으로써 종친의 비리를 없애려는 의도였습니다.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가 아버지가 자신의 첩을 빼앗았다고 불만에 차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며 함부로 사람을 죽이자 이혜와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무리를 형벌로 다스리고 이혜에게도 엄한 처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종은 관용과 제재와 배려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위엄을 잃지 않고 한편으로는 목숨도 아꼈던 것입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언어민권주의자

 세종은 정치와 학문에도 위민과 창의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자신의 뜻을 문자로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훈민정음> 서문 :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이 말은 곧 정음 창제는 백성을 위한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어려운 한문은 평생 배우고도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선비들은 어렵게 한문을 배우고 관습으로 쓰는 축문이나 편지, 혼서 따위를 한문으로 써서 대행해 주며 백성들에게 거들먹거렸습니다. 이렇듯 한자 생활권에서는 문맹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종은 이런 문자를 환경을 바꾸려고 한 것입니다.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등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 끝에 정음을 창제했습니다. 학자들보다는 오히려 둘째 딸 정화공주와 아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도움을 더 받았습니다. 한문을 선호한 이들을 배제한 것입니다. 세종은 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 등 7명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기도 하고, 처음에는 찬성해 놓고 뒤에 반대한 김문은 장형 100대에 처했으며 정창손은 벼슬을 떼 버렸습니다. 또 대간들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려보냈으며 언문으로 시험을 보게도 하고 서리 10여 명을 뽑아서 언문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한문 책들을 한글로 풀이했습니다. 

 

 세종의 열정적 노력으로 궁중에서는 언문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차츰 역대의 임금도 관례대로 한문 전교를 내리면서 언문으로 옮겨서 공포하기도 하고 효유문 등 조정의 정책을 알리는 글도 언문과 한문 두 가지로 공포했습니다. 세종은 백성의 의사 표현과 이해를 위해서 훈민정음을 만들고 보급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문화, 서민문화를 화려하게 만들었고 문자 우민정책을 없애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종은 언어귀족주의자가 아니라 언어민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많은 업적들

 세종은 또한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농사법을 고쳐서 <농사직설>을 짓게 하고 우리의 향약을 모아 후세에 전하게 했습니다. 또한 여러가지 천문기기와 과학기술을 개발하게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정리해 의례에 사용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넓히기 위해서 <삼강행실도>를 간행해 보급했습니다. 

 

 세종은 수령이 현지에 내려갈 때에는 어김없이 불러서 수령이 해야 할 일을 낱낱이 일러 주시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과 형벌을 조심스럽게 베풀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죄인들에게 한 대의 매를 때리더라도 법조문에 따라서 시행하라고 일러주었고 그 조문을 관아의 벽에 걸어 놓게 했습니다. 감옥을 만드는 도면을 그려서 춥거나 더운 철에 따라서 그 위치를 달리해서 죄수가 병들지 않게 배려했습니다. 

 

 집현전을 설치해서 고금의 서적을 수장하고 학사들을 모았으며, 녹봉을 넉넉하게 주면서 독서와 연구에 진력하게 했습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직접 나가서 학사들과 곧잘 토론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내시를 집현전에 보내서 학사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아보게 했습니다. 하루는 새벽에 신숙주가 글을 읽고 있다고 하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전해 주게 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같이 낮은 신분의 인물이라도 재주가 뛰어나면 높은 벼슬을 주어서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낮은 벼슬아치 출신의 천문학자들에게 서울 주변의 수령자리를 주어서 연구와 관찰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정사를 부지런히 보았으나 혼자 모든 일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적절한 벼슬아치를 골라서 정승과 판서를 맡기고 그들의 손을 빌려 정치를 폈습니다. 합리적이고 근실한 성품을 지닌 황희를 영의정 자리에 앉히고 맹사성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여러 정사를 맡겼습니다. 

 

 유교를 익힌 벼슬아치들이 불교를 억제하려고 나섰지만 그 자신은 부처의 공덕을 기린 <월인천강지곡>을 직접 지어서 백성들이 노래하게 했습니다. 또한 만년에, 철폐했었던 내불당을 복원해서 비빈과 궁녀들은 물론 궁중에서도 불교를 받들게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불경을 읽어도 결코 부처에게 절을 하거나 빌지는 않는 절도도 보여 주었습니다. 여느 유학자들과 달리 불교를 과도하게 이단으로 몰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성현의 학문을 열심히 읽었지만 성리학 같은 관념적인 이론에도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학문 또는 백성에게 유용한 이론과 실제에 몰두했습니다. 당연히 풍수설이나 비기 따위 신비의 학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외교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서 엄청난 국익을 챙겼습니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말 2만 마리를 보내라고 강요했으나 세종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엄청난 말의 수를 채우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말이 육지로 요하를 건너거나 배로 산동반도로 보내 남경까지 가는 경비는 말을 기르는 비용보다 훨씬 더 들었습니다. 이것은 얼토당토 않은 요구였습니다. 무력으로 임금이 된 태종은 책봉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말 500필을 요동에 보냈고, 그 뒤에 책봉을 받고 나서는 연달아서 6000필의 말을 바쳤습니다. 

세종도 즉위한 뒤에 명나라의 요구로 말 300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또 많은 금, 은을 조공품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 성조는 북방을 정벌하면서 말 1만 필을 요구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보내야 되는 처지였습니다. 

이때 세종은 '인삼 로비'를 벌였습니다. 곧 명나라에서 오는 칙사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은밀히 로비를 해서 인삼의 효용성을 선전하고 금, 은과 말을 인삼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은 "고려의 인삼은 진시황이 구하려던 불사약이다."는 선전에 넘어가서 인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세종은 국가이익을 영구히 가져오게 한 뛰어난 외교수완을 보인 것입니다. 

 

 세종은 국경지대의 안정을 도모하여 국경을 개척해서 오늘날의 두만강과 압록강의 국경을 긋게 한 단서를 만들었고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 쓰시마를 정벌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외교정치에도 큰 업적을 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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