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주년 6.25전쟁
6.25전쟁이 일어난 지 7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서 불법 남침함으로 인해서 일어난 한반도의 전쟁을 말합니다.
6.25전쟁(한국전쟁, Korean Conflict)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으로 이후에 미국, 중국, 소련 등 주변국이 개입하면서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간의 전쟁으로 심화되었습니다. 이후에 1953년 7월 27일 한국군 대표없이 UN군 대표 클라크, 북한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의 '정전협정서' 서명이 이루어지면서, 국제법상 한국전쟁은 일시 중단된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8월 15일 광복
1945년 8월 10일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서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고 8월 15일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때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 지역은 소련군, 이남 지역은 미군이 진주한 것을 계기로, 남북에 각각 미,소 군정에 의한 분단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자주독립 통일국가를 향한 염원은 남한에 대한민국,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좌절되었고, 분단은 고착 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북한군의 기습적 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상 지역에 북한군의 기습적 남침이 시작되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6월 25일 오전 11시 북한은 남침을 은폐하기 위해서 평양방송을 통해서 '이승만 정권의 남조선 군대에 의한 북침'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 소련, 중국, 북한이 사전 모의를 통해서 전쟁을 준비했다는 자료가 발표되어, 북침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의 중국과 소련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6월 28일,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UN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 북한군 침략 격퇴를 위한 '6.26결의안'을 통과시키며 UN군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한.미 연합작전 수행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7월 18일부터 UN군 사령관에 위임이 되었습니다. 9월 15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으며 2주일 뒤에 9월 28일, 북한군에 피탈된지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이 탈환이 되었습니다.
수도 탈환 이후에 38선 이남의 북한국은 모두 격멸되었으나, 국토 통일을 목적으로 삼고있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0월 1일 국군의 선두부대가 38선을 돌파하였습니다. 여기에 10월 7일 UN총회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10월 9일부터 국군과 UN군의 전면적인 북진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4 후퇴
그러나 미국의 북한 점령을 경계한 마오쩌둥은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하여 북한에 중공군을 참전시켰습니다.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세에 밀려서 38선 남쪽까지 후퇴한 UN군은 1951년 1월 4일까지 한강이북의 모든 모든 부대를 철수시켰습니다. UN군의 철수 직후에 서울은 중공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UN군의 철군계획과 제주도 임시정부 이전계획까지 은밀히 수립하고 있었지만 한국 정부에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국군과 UN군이 전선에서 위기에 처하자, 국민의 전쟁참여 결의를 다지고 무장한 100만 청년을 투입하여 중공군을 격퇴시켜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과 UN군은 서로의 전력 손실과 장기전 우려고 인하여 휴전회담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는 동서 간의 냉전체제 속에서 권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논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휴전협상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에 처음 열린 이후로도 UN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반복되며 약 2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한국군 대표없이 UN군 대표 클라크, 북한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3년 1개월 2일, 총 1129일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휴전되었습니다. 또한 정전협정에 따라서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가 한반도의 정전체제 이행여부를 감시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UN군과 공산군은 종전협정이 아닌 정접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 한국전쟁은 일시 중단된 상태로 남았습니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종결하는 의미의 평화조약, 강화조약의 성질이 아니라 단순히 전투행위를 중지시키는 협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휴전회담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휴전협상에 대한 반대의사를 국제사회에 강력히 표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1953년 10월 1일 전후 한국사회의 안전보장을 위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미군 주둔이 허용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미 연합방위체제,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각종 안보, 군사협정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참고: 상식사전, 백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