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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by 나도1등복권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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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선 또는 귀선은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했던 조선수군의 군함입니다.
기존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을 개량한 것으로, 지붕을 덧씌워서 방어력을 높이고 포문을 많이 설치해서 사격 공격을 용이하게 하도록 구조를 변경, 앞에는 용머리 형태의 총각 겸 포문을 달아서 돌격전에도 용이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거북선과 전쟁의 역사

당시 일본 수군의 전술은 배에서 직접 사격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기동성이 빠른 소형 배를 타고 적함에 난입해서 근접전으로 배를 뺏거나 횃불을 던져서 태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곡하게 박은 거북선에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해서 통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근접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화력으로 적함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말 그대로 해상 요새 수준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대용이 거북선의 제작자라고 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야사에만 등장하는데 야사에 거북선 제작에 관여한 사람 수만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서는 나대용 설을 채택했는지 이 사람이랑 동생이 어느날 이순신 앞에서 설계도를 가져와서 브리핑합니다. 다른 야사에서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도인었던 송구봉이 임란을 예견하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만들어 두었다가 이순신에게 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수군에는 전라 좌수군 방답진에 소속 된 방답 귀선, 전라 좌수영 본영에 소속된 영귀선, 통제영 창설 이후 건조된 통제영 귀선의 3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원균의 칠천량 해전 당시에 모두 침몰했습니다.



 

 

거북선의 개발과 과정

세간에는 이순신이 직접 철갑선인 거북선을 개발하였고 이에 직접 탑승했을 거라는 통념이 있지만,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고 이순신도 거북선을 처음 개발한 인물은 아니라고 합니다. 조선 수군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투자와 신형함 개발을 해 왔습니다. 조선 초기의 주력함인 대선에서 성종 때의 맹선으로 그리고 명종 시기에 와서 전선(판옥선의 공식 함명)이 주력함으로 등장하는데 이 모든 사실을 무시하고 태종 때의 거북선과 임진왜란 시기의 거북선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항해시대의 피리깃과 현용 프리깃을 같은 배라고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엄격한 법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 왕조에서 기존 규정에 없는 새로운 군함을 만든다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그 결단을 이순신 장군이 내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거북선은 고려시에 개발되었던 군함 과선(배에 창, 칼을 박아 적의 침입을 막음)과 여말선초의 검선을 참고한 듯합니다. 그 후에 묻혀 있던 것을 새로운 형태로 부활 시킨 것입니다. 태종실록에도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두 차례 있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것과는 이름은 같지만 세부 구조도 같을지에 대해서는 설계가 전해지지 않아서 알 길이 없습니다.

태종실록 30권(태종 15년) 좌대언 탁신이 올린 상소에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어서 적을 방어해내기 위한 방호 장비는 갖춘 것 같습니다.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1척에는 판옥선의 약 125명 보다는 더 많이 승선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시 병력 부족으로 인해서 최소한으로 승선했던 숫자로 보입니다. 전후 숙종 대의 기록에 의하면 정상적인 편제라면 약 150여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부선장만 추가하면 오늘날의 중령급 함장이 지휘하는 함과 편제가 거의 일치합니다.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완전한 형태가 남아있지는 않아서 앞에 달려있는 거북이 머리(용머리)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들이 많습니다. 입에 총포가 달려있는 총포문이었다는 설이 있고, 대포문이었다는 설도 있으며 불을 뿜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독가스를 뿜는 화확전 분사라고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독가스 분사구까지는 아니고, 적의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용머리 안에서 유황 등을 태워서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설로 다른 배를 부딪쳐서 파괴하는 충각설도 있지만 학술적인 근거는 없으며 고 김재근 선생의 저서 <한국의 배>에 기초해 보면 전라 좌수영 귀선의 용머리 외에 선체 하부에 설치한 귀면의 용도에 관한 설과 헷갈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은 총포문이나 대포문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현존하는 거북선은 1980년대에 복원되어 다시 만들어진 복제품들입니다.



 

 

거북선의 운용 기간

정확히 언제까지 운영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가 없습니다.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는 그림이 남아있지만 이것이 이순신 사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대에도 운영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자료입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종대인 조선 후기에도 거북선은 운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외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실패한 이후인 1888년에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인 '건백서'에서 "삼면이 바다인 조선엔 반드시 해군이 필요하다."라는 글을 남기며 거북선과 관련된 글을 기록했는데 "예전에는 거북선 같은 함선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 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이 올라오기 불과 16년 전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거북선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거북선이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는 그 운용 수량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거북선에 대한 인식과 자긍심

거북선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자긍심의 상징물로도 쓰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영국에서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거북선이 유명세를 떨치게 만든 이순신 함대에서 거북선은 주력함이 아니었으며 현재 알려진 만큼 함대 내에서의 전략적 중요도도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북선의 건조는 극소수만 이루어졌고, 이를 칠천량에서 다 잃고 난 다음 명량해전 이후 건조할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단 1대도 거북선을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순신 입장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큰 손상을 입은 수군을 다급히 재건해야 하는 입장에서 건조비와 시간이 많이 드는 거북선을 후순위로 미루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거북선의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면 19세기 고종 시절까지도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현역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MIT(메사추세츠 공과 대학교) 내 해양전시관의 역사관에는 "인류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타이틀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때 경상남도에서는 임진왜란 때 침몰했을 거북선을 찾기 위해서 수중 탐사 중이라고 했지만, 현재는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안 쓰이는 지폐인 500원짜리 지폐와 5원짜리 동전에도 거북선이 도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폐에는 정주영 회장과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울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에 한국이 제대로 된 현대식 조선소조차도 없음을 이유로 들며 입찰도 못 해보고 거부당하자 정주영 회장은 한국 정부에서 곧 전폭적인 지원을 해서 현대식 조선소를 지을테니 그 화물선은 우리가 수주해서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가지고 있던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도 보여주면서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해군의 대부분 마크에 필수 요소입니다. 각 해역 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 해군교육사령부 등 주력 부대, 제7기동전단, 충무공 이순신함 등 전단, 함정 마크에도 사용됩니다. 또 장교 정모와 함정에 근무하는 승조원 뱃지에도 들어가며, 사관실 식기에도 거북선이 박혀있습니다.
또한 여천시의 삼여 통합 전의 마지막 휘장에도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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