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은 한국 아동문학 초기에 활동한 작가이며 호는 소파입니다. 필명은 몽중인, 북극성, 금파리, 잔물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창작과 계몽 활동을 통해서 아동 복지와 지위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했으며, 아동문화단체 색동회를 조직했습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정환의 유년 시절
1899년 11월 9일 한성 적선방 야주현,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다동 근처에서 미곡상을 하던 방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5살때부터 조부에게 천자문을 배웠으며, 1905년에 두살 위의 삼촌이 다니던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가장 어린 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는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는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했지만 1907년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힘들게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13년 상업을 전공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1914년 중퇴했습니다.
방정환이 문학가를 꿈꾸게 된 것은 10살이 되던 1908년 어느 미술가가 그에게 선물한 환등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환등기를 영사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영상으로 연출하는 것과 변사 흉내를 내면서 연기를 하는 데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방정환의 인생의 전환기
1916년 생계를 돕기 위해서 조선 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기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1917년 천도교의 교주였던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방정환은 손병희의 영향으로 191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광렬, 이중각, 이복원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해서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발간했습니다. <청춘> 9월호에 수필 <관화>를 발표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7일간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방정환의 활동과 업적들
그는 <개벽>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7월호에 시<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습니다. 이해 발표한 번역 동시<어린이 노래>를 발표하면서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어린이의 권익 보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 5월 1일 이정호, 김기전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서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22년에는 천도교소년회 중심으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개벽사에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습니다. 1923년 3월 20일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그해 5월 1일 도쿄에서 손진태, 윤극영, 진장섭, 고한승 등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했습니다. 색동회는 발기회록에서 "동화 및 동요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 아동문제까지 할 사"라고 밝혔듯이 이후에 전국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 아동예술강습회, 아동예술전람회, 소년문제강연회를 열어서 소년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했으며,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의회 지도위원, 1927년에는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928년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개편되고 소년운동 노선이 변화하지 일선에서 물러나며 <어린이>, <학생> 등의 편집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익힌 이야기 솜씨로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죄수들까지 동화구연을 했는데, 듣는 사람은 모두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을 흘릴 정도록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다고 전해집니다. 매년 70회가 넘는 동화 구연과 강연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닌 탓으로, 건간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원래 비만에 고혈압이 있었는데, 1931년부터 과로가 겹치고 지나친 흡연의 영향으로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어 1931년 7월 23일 병상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방정환의 업적과 평가들
방정환의 아동문화운동은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문필활동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1920년대 한국 사회전반에 나타나 있던 어린이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서 희노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그는 <어린이> 등 여러 아동잡지에 창작작품을 물론 해외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방정환의 번역작품은 선량, 노력, 정직 등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해학과 풍자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교화와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창작동화는 비록 양적으로는 번역동화에 미치지 못하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명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일제의 지배와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 고통받는 어린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일깨워주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행한 어린이들은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독자들의 감상에만 호소하므로 소극적인 감상주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번역동화와 창작동화에서 나타나듯이 1920년대 한국아동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고있습니다.
1940년 5월 1일에 마해송, 최영주가 <소파전집>을 펴냈으며, 1957년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화운동과 아동문학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해서 매년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197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며, 1980년에는 건국포장을 수여했습니다. 1998년에는 재단법인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남산 외곽의 소파길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명명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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