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일대기
본관은 덕수이며, 자는 여해이고,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내려오는 문반의 가문으로, 이돈수의 12대손입니다. 아버지는 이정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변수림의 딸입니다.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시대는 조선 전기이며, 출생은 1545년(명종 즉위년)이고, 사망은 1598년(선조 31)입니다.
이순신의 경력은 동구비보권관, 건원보권관, 사복시주부, 정읍현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습니다. 이순신의 시호는 충무입니다. 대표작으로는 난중일기가 있습니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서서히 나타냅니다.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 등 지치주의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 하시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이후로,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태어날 때는 가세가 이미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훗날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변씨는 현모양처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 교육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 이요신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까지 모두 4형제였습니다.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입니다.
이순신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시재에도 특출났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며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강한 정의감은 훗날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서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수 있었으며, 부모님을 일찍이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합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이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서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서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가 되던 해에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습니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서,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습니다.
이어서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 발포수군만호를 거쳐서, 1583년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을 역임하였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관으로서의 진로는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복시주부에 이어서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지만,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해서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서 부득이 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것이 이순신의 죄라고 하여 문책하였습니다. 하지만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장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첫번째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서 전라도의 조방장, 선전관 등이 되었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에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로 승진, 이어서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냈으며,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곧 왜군의 침략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여수)을 근거지로 삼아서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나아가 군량의 확보를 위해서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뒤였습니다.
이 날은 국기일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에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서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지만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서 육지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습니다. 이순신의 휘하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었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에 기함에 승선하였습니다.
이순신의 전투와 거북선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습니다. 이틀 뒤에 한산도에 이르러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니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에 척후선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척이었습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서 도망하려고 했지만 우리 수군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됩니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습니다. 제1차 출동 후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에 다음 출동을 대비하고 있었던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해서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습니다.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습니다.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서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서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공격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들을 바다로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해서 왜선 12척을 격파하고 많은 왜군을 무찔렀습니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 등이 부상을 입었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서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실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 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가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지만,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습니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인 창신도를 떠났습니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아주 반갑게 맞았습니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 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습니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했습니다. 당항포 내만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습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했고 왜선은 모두 소실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격되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 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해서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 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에 노랭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7척과도 합세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의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서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에는 적장 와키사카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에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습니다.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에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 와타나베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장수들이 전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에 승격되었습니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습니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 가토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중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해서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섬멸하였습니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전라좌, 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 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해서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를 지나서 파도를 해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에 이르렀을 때에,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습니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려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했습니다. 우부장 정운 등이 선두에 나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 중, 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놀라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서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습니다. 아군은 이에 맞서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 정훈이 전사했습니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벽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서 본영으로 삼고, 그 뒤에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서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뒤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해서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습니다.
이순신의 고난과 시련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해서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했지만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고니시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에 들어온 뒤였습니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서, 이를 구실로 먼저 모함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서 이순신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 믿고 크게 노해서,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마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롤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가 없습니다.'하고 간청하였으나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여주지 않았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습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순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는 치계를 올렸지만 허사였습니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하였습니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 때에 한 달여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서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서 성복을 마친 다음 슬픔을 뒤로 하고 다시 남쪽으로 햐하였습니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서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동안 이순신이 애써 길러온 무적의 함대는 그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초계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가 없게 되었구나."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왕은 비국대신들을 불러모아 의논하였지만 당황해서 바로 대답도 못하였습니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 씌워서 죽이려고 했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는지 교서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가 있겠소."하며 얼버무리고 지나갔습니다.
통제사에 재임용되어서 남해 등지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남은 군사 120명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명량해전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해서 31척을 쳐부수는 큰 전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는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입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서 돌아와 수만 가를 이르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해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 향해서 맹공을 가했고,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게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버지의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했지만,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못하게 하고 옷을 시신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고, 북이 치며 앞으로 나가서 싸울 것을 재촉했습니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모른 채 기운을 내서 분투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습니다.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고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길이 남을 인물입니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가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 정유년 사이 통제사 같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지방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습니다.
정인보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에서 "공은 명장보다도 성자이다. 신묘불측이 오직 지성측달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는 《한국산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해전사연구가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서학자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 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함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 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한 데 대해서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의한 것이고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고 「난중일기」, 시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고,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습니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습니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습니다.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큽니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 입사되었습니다.
그 뒤에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서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에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의해서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했으며, 새로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해전 순서 (음력)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 사천해전(1592년 5월 29일) - 한산도해전(1592년 7월 8일) - 부산해전(1592년 9월 1일) - 웅포해전(1593년 2월 10일, 최초의 패전) - 당항포해전(1594년 3월 4일) - 장문포해전(1594년 9월 29일) - 정유재란(일본의 재침략), 칠전량해전(원균 삼도수군통제사의 대패) -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 - 절이도해전(1598년 7월 19일, 조.명 연합군) - 왜교성해전(1598년 9월 19일, 조.명 수륙연합군의 패전) - 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전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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